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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16 스데반의 설교(3) : 이스라엘의 반역(사도행전 7:37-53)
- 2018.01.13 교회 안팎의 도전과 응전(사도행전 6:1-15)
- 2018.01.1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다(사도행전 5:27-42)
- 2018.01.11 세상이 가두지 못한 복음(사도행전 5:12-26)
- 2018.01.10 헌신을 가장한 위선(사도행전 4:32-5:11)
- 2018.01.09 시련 속에 자라는 교회(사도행전 4:13-31)
- 2018.01.08 예수, 구원의 이름(사도행전 4:1-12)
- 2018.01.05 첫 교회, 새 교회, 참 교회(사도행전 2:37-2:47)
- 2018.01.04 베드로의 설교(사도행전 2:14-2:36)
- 2018.01.03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사도행전 2:1-2:13)
글
http://www.su.or.kr/03bible/daily/qtView.do?qtType=QT1
스데반의 설교(3) : 이스라엘의 반역
(사도행전 7:37-53)
37. |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
38. |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
39. |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
40. |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
41. |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
42. |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
43. |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
44. |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
45. |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
46. |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
47. |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
48. |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
49. |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
50. |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
51. |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
52. |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
53. |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구약 교회의 맴버가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교회의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만든 성전(성막)에 가두어 놓고 성전 자체를 숭배했습니다. 또한 허울뿐인 자신들의 종교 행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조상때로부터 선지자들을 박해했고, 또 그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를 잡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임재가 없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신자들은 이처럼 영적인 소경이 되어 오히려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의 만면교사로 삼아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날마나 점검하며 살게 하옵소서!
주님! 주님의 뜻에 반하는 삶을 살까 두렵습니다.
날마다 나를 인도해 주셔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wixo4tsUk1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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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http://www.su.or.kr/03bible/daily/qtView.do?qtType=QT1
교회 안팎의 도전과 응전
(사도행전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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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
2. |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
3. |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
4. |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
5. |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
6. |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
7.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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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
9. |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
10. |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
11. |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
12. |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
13. |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
14. |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
15. |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
문제가 없는 교회가 없다고,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계속해서 폭발적인 증가로 인해 양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었지만 외부로부터는 유대교의 핍박, 내부로부터는 위선의 문제(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등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을 보면 교회 안에서 히브리파와 헬라파의 갈등이 발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네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는 일이 잦아지자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갈등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교회 내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소수의 헬라파 유대인들의 갈등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도들은 일곱 집사를 선출하여 교회의 행정업무를 담당케 하고, 자신들은 목회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을 하게 됩니다.
일곱 집사를 선출하는 기준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히 간단한 것 같지만 이 기준은 굉장히 무게감이 있고 중요한 기준입니다. 게다가 일곱 집사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이 이름이 헬라식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큽니다. 다수를 차지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면 일곱 집사까지 히브리파 유대인을 세웠을 것이지만, 헬라파 유대인들로 교회의 행정 리더를 삼은 것은 그 만큼 예루살렘교회가 성숙한 공동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직접적으로 구제에서 배제된 헬라파 과부들을 도울 수 있는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조치였습니다.
이렇게 선출된 집사 중 스데반은 단순히 구제와 교회 행정사역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고, 다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논쟁을 합니다. 물론 구체적인 논쟁의 내용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가 표적을 행했다고 했는데 표적이라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할 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었고, 스데반이 표적을 행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선포했고 그로 인해 다른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스데반을 당해내지 못한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매수해서 스데반을 해치기 위해 모함하고 거짓 증거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와같은 터무니 없는 상황 속에서도 스데반은 천사의 얼굴로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문제와 갈등 속에서 예루살렘교회는 세속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그 문제를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다수의 폭력 그리고 인기투표식의 방법이 아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을 받는 사람들을 집사로 세웠고,
또 실질적으로 구제에 빠지고 있는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을 위해 헬라파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집사를 세웠습니다. 이것은 성숙한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스데반은 교회의 행정을 위해 세워진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지만, 탁월한 복음 전도자였고 또한 참된 신앙인으로 자신을 모함하는 세력 앞에서도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님!
오늘날의 교회가 세속적인 방법으로 운영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목양되게 하옵소서!
다수의 횡포가 교회를 흔들고, 마치 사울을 왕으로 뽑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직분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합한 사람으로 신실한 사람으로 바르게 직분자를 선출케 하옵소서!
교회 안에서 집사라는 직분이 마치 아줌마, 아저씨처럼 되어버린 세태속에서 직분자들이 자신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과 섬김을 나타내게 하옵소서!
또한 스데반처럼 진리로 거짓과 싸우는 사람되게 하시고, 거짓과 모함 속에서도 천사의 마음과 행동을 나타낼 수 있게 하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jOoxZnVbH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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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http://www.su.or.kr/03bible/daily/qtView.do?qtType=QT1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사도행전 5:27-42)
27. |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
28. |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
29. |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
30. |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
31. |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
32. |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
33. |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
34. |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
35. |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
36. |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
37. |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
38. |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
39. |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
40. |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
41. |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
42. |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
두 개의 가치관이 크게 충돌하고 있습니다.
결국 같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두 부류는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한쪽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신들이 정한 법을 지키지 않은 상대방에게 분노하며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은 하늘의 가치관으로 이 세상의 법보다 하늘의 법이 더 우선된다는 것을 주장하며 이에 반박하고 있습니다.
역시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대화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평행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설명해도 이 세상의 가치관과 상식을 가지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믿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이에 화를 낼 것입니다.
지금 사도들은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 공회에 또 다시 붙잡혀 왔습니다.
공회원들은 자신들의 경고를 듣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굉장히 큰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위축되지 않고 첫 재판 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죽인 악한 권세보다 하늘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옳다고 응수했습니다.
사실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기 때문에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사도들에게 사형을 언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전에 예수님 때처럼 그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총독에게 고발을 하고 이들을 죽여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가멜리엘이라는 바리새인 율법교사가 이 상황을 중재합니다.
그는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예를 들며,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과 그들의 행동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면 우리가 이 사람들을 무너뜨릴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공회원들은 이 말을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 채찍질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풀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과 박해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기뻐하면서 또 다시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했습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였던 가말리엘의 이 말은 결국 사도행전이 진행되면서 그리고 교회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가 결국 사람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참된 종교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서슬퍼런 산헤드린 공회는 사도들에게 윽박지르고 경고하고 매질을 할 수는 있었지만, 이들을 죽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한정적인 권세입니다. 결국 신자가 두려워할 존재는 이렇게 우리를 위협하는 세상의 권세가 아니라, 우리를 심판하실 주님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사도들이 자신들을 핍박하는 세상을 대항할 수 있었던 이유,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며 계속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들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요, 또한 성령도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세상의 어떤 고난과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는 삶. 그리고 삶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 살아있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협하고, 불이익을 주고, 핍박하고, 죽이려드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심판하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오늘 하루를 살게 하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ljXenepFyT4&list=PLjIscbgI3-wQHV10UnbR7x7vnqMvC0nQ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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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http://www.su.or.kr/03bible/daily/qtView.do?qtType=QT1
세상이 가두지 못한 복음
(사도행전 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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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
13. |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
14. |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
15. |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
16. |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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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
18. |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
19. |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
20. |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
21. |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
22. |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
23. |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
24. |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
25. |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
26. |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
교회 내에서 불미스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이 있었지만, 솔로몬 행각을 중심으로 말씀 선포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고, 이로 인해 복음의 역사를 통한 교회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복음이 선포될 때는 상반되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솔로몬 행각으로 모여 주님의 역사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역사에 접촉하지 못하는(13절) 또 한 부류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믿지 않는 그 사람들조차 교회를 칭송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복음이 선포되어 놀라운 역사(단순히 기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선포를 통해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회심이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눈에 보이는 기적보다 더 큰 복음의 역사입니다.)가 일어나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믿는 자의 무리인 교회와 불신자의 무리인 세상으로 인류를 갈라놓습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세상은 교회를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빛이 어둠 가운데 비춰지면 어둠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 당시 세상은 이 교회를 인정합니다. 13절을 보면 "백성이 칭송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13년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부터 제국의 종교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기 전까지 교회는 로마 제국의 혹독한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순결했고, 세상은 이러한 교회를 흠모했습니다.
복음이 온전하게 역사하여 교회가 일어나게 될 때 이처럼 세상은 교회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물론 그들은 알지 못하지만 교회는 썩어가는 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사상이나, 교육 그리고 권력도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 받는 것이 인류의 유일한 소망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은 이것을 가만해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17, 18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자신들의 권세와 이권에 눈먼 종교지도자들을 통해 이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위한 계략이 시작되지만, 천사들을 통해 사도들을 풀려나고 계속해서 복음은 선포됩니다.
교회는 이 땅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뤄가십니다.
교회를 통해 회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교회를 통해 어둔 세상에 빛을 비추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교회의 생명은 바로 바른 복음의 선포입니다. 복음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인간 동호회요, 관계를 맺는 커뮤니티일 뿐입니다.
주님!
이 세상이 넘보지 못하는 거룩한 교회가 이 땅에 더 많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강단에서 복음 이외의 쓸데 없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생명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 예배를 드릴 때마다 믿는 사람의 무리들이 더 많이 일어나게 하시고, 이들을 통해 이 썩어가는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케 하옵소서
주님!
이 땅의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많은 비난과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입에 담지 못한 욕설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을 비통히 여기고 가슴을 치며 회개케 하시고, 다시 한번 복음의 역사가 이 땅 가운데 일어나 세상의 소망!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주님!
하늘교회가 세상이 가둘 수 없는 복음을 가지고, 이 세상 속에서 바른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는 살아있는 교회, 건강한 교회 되게 하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A3yUylOaLhs
(지난번에 나눴던 찬양인데 한 번 더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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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을 가장한 위선
(사도행전 4:32-5:11)
4:29-37절이 묘사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였습니다. 32-35절은 그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1)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정신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2) 사도들이 부활의 메세지를 선포했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3) 성도들에게 부족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자신의 밭과 집을 팔아 사도들에게 전달했고, 사도들은 그것을 가지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묘사를 보고 사유재산권을 포기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형제자매를 위해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타적인 마음과 이기적인 마음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예루살렘교회는 이처럼 이타적인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루살렘교회도 연약한 지상교회의 하나였고, 5장부터 6장은 이러한 문제들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번째 문제는 바로 안으로부터의 부정행위였습니다.(5:1-11)
바나바가 자기의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은 것을 본(물론 4:34-35절을 보면 바나바 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들도 이같은 행위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바나바를 이에 대한 대표로 기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는 "자신들의 땅 일부분"을 팔았고, 그 가운데 얼마를 떼어 몰래 숨겨 놓고, 나머지만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바나바로 대표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동체에 자신의 소유를 드리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두 가지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나는 부담감. 저들처럼 우리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라는 마음과, 두번째로 부러움. 이런 행위를 통해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에 부러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협했습니다.
팔되 다 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팔았지만 다 드리지 않고 일부를 감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기만이며, 위선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땅은 파리 전에도 그대의 것이었고, 판 뒤에도 그 돈을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성령을 속일 마음을 먹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
즉, 단순하고 사소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교회 공동체의 입장에서 거짓과 부정은 교회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결을 위협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엄중한 심판이 뒤따랐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작게 보이고, 관대하게 생각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리고 거룩한 공동체의 입장에서 그것은 큰 죄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들의 미숙한 행동이라고 치부하기에 그들의 잘못은 심판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타협!
그리고 하나님 앞에 위선이 얼마나 큰 죄인이 우리는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자신 둘의 관계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그곳에서 내 신앙의 본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드리기 원합니다. 세상에 한 발을 걸치고, 하나님의 간을 보는 행위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전부를 드릴 때 우리는 더 큰 전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
하나님 만을 신앙하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타협하지 않고, 결정의 순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Y_lctkQFLqk
https://www.youtube.com/watch?v=dZWz2_RA0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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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속에 자라는 교회
(사도행전 4:13-4:31)
산헤드린 공의회에 모였던 당대 종교지도자들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베드로와 요한이 성경에 관한 전문가요 권위자라 할 수 있는 자신들 앞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반박할 수 없는 논지를 가지고 말하는 것에 놀랐고, 또 이를 통해 뒤늦게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자들이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날 때부터 걷지 못했다가 나은 사람이 지금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그들은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머리를 맞대고 내린 그들의 결론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위협과 경고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집행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닫게 한 것일까요?
그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적 행동을 이행하는 종교인이었기에 주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과 감각에 죽어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겐 하나님 나라의 진행과 성취보다 자신들의 나라, 자신들이 이뤄놓은 공교한 세력과 이권이 더 소중했습니다.
결국 이 무지한 종교인들은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본 많은 사람들로 인해, 자신들의 경고와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겠다고 천명한 사도들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몇 마디 더 경고한 후 놓아 주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비겁하고, 구차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내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주님을 깊이 있게 신뢰하지 못하고, 단순히 종교적인 행동만을 이행함으로 죽어 있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래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여, 무관심하고, 더 나아가 그 역사의 걸림돌이 되어 그것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 나의 눈을 열어 주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시고, 저 무지한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또한 내 성을 쌓고, 내 이권을 취하는 것에 혈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나의 삶을 통해 주님 나라 이뤄지는 온전한 삶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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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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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구원의 이름
(사도행전 4:1-12)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베드로와 요한.
그 이후 사람들은 이 놀라운 역사 앞에 베드로와 요한을 보기 위해 솔로몬 행각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러한 역사 예수님임의 이름과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졌음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복음을 선포한 후 회개하고 믿을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을 경비하던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앞장섰던 사람들로 두 사도가 백성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 마음에 편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곧 죄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신들이 불의가 드러나는 것이며, 영적으로 설명하면 어둠은 빛이 비췰 때 본능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도를 다음날까지 옥에 가둔 후 이튿날 유대 통치자들과 장로들과 율법사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앞에 세워 두고 "도대체 너희가 무슨 능력으로, 또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며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선포합니다.
당신들이 못박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부활하셨고, 그의 능력으로 걷지 못하던 사람이 나음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건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당사자들 앞에서 목숨을 걸고 니들이 잘못했고, 틀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시편 118:22)이 되셨음'을 말하고, 예수님 외에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들 앞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 있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일전에도 이와같은 상황에 직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과 함께 공회에 끌려갈 수 있었음에도 그 때 제자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예루살렘 밖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갔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자 결국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마지막에는 저주하며 부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습니다. 이들은 당당하게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예수님 이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비겁하고, 겁 많고 아니 어쩌면 그러한 제자들의 행동이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제 이들은 사자처럼 담대해졌고, 복음의 증거 앞에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돈 때문에 이들이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어떤 사상이 이들의 마음을 바꾸어놓은 것일까요?
예수님의 부활 밖에는 이것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성령의 임재 밖에는 이러한 변화를 이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그리고 몸으로 체험했고, 성령의 임재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즉, 그들의 삶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된 것입니다(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
주님이 없다하고, 주님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는 이 세상의 정신 앞에서,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내 삶에서 굉장히 불리하고,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복음을 들고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선포했던 베드로처럼 내 입술로 내 삶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선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 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이 배타적인 진리로 인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해도, 내 삶을 통해 그것이 참된 진리임을 증거할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이것이 내 마음의 각오와 다짐이 아닌 부활의 증인으로!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으로 이 일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QxpAcEW1j9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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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교회, 새 교회, 참 교회
(사도행전 2:37-2:47)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36절).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선포한 베드로의 설교에 사람들의 마음은 녹았습니다. 성령이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을 비추자 강한 부딪침! 찔림이 그들의 마음 속에 생겨난 것입니다.
결국 성령 충만하여 난 곳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놀라 당황하며 "이 어찌 된 일이냐?"(12절)이라고 묻던 사람들은, 복음의 선포 앞에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37절)라며 탄식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날에 삼천명이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가 탄생합니다.
42절은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둘째 서로 교제하고, 셋째 오로지 기도하는 공동체
교회는 자기 내부로부터의 참선과 묵상을 통해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고백 그리고 그들을 통해 주신 말씀을 통해 세워집니다. 따라서 사도의 전통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참된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서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수직적인 교제가 생겨나면, 자동적으로 수평적인 이웃과의 교제가 시작됩니다. 고립적이고 독자적인 신앙은 없습니다. 수직적인 은혜에 비례하여 수평적인 나눔과 교제는 더욱 풍성해 집니다.
오로지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경말씀을 인문학으로 공부하는, 또는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 같이 음식을 나누는 세상의 동아리가 아닙니다.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하늘과 소통하고, 사도들로부터 전수받은 말씀을 자신의 삶에 세기는 작업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결국 기도하는 행위는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강력한 반증이며,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되고 있다는 시금석입니다.
물론 이러한 초대교회가 완벽한 교회는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복음 선포는 통해 나타난 최초의 교회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묘사해 주고 있고, 이 말씀을 오늘 내가 속한 교회에 비추어 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우리 교회가 사도들에게 주셨던 그 말씀 위에 서서, 세상의 관계! 술먹고 어우러지는 그런 세속적인 관계를 넘어서는(비교할수도 없는) 영적인 친밀함을 누릴 수 있는 관계로 서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에 세기고, 함께 뜻을 분별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하게 하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jkfIGiDTa8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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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설교
(사도행전 2:14-2:36)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이 놀라운 현상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은 오후 3시 즉 낮이고 너희가 생각한 것처럼 이 사람들이 취한 거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구약의 요엘 선지자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은 왕, 예언자, 제사장, 사사 등과 같이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임했습니다. 그러나 요엘 선지자는 마지막 날(말세)이 되면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말세가 시작되어 그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 남녀노소 모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서 예수님을 주님이라 믿을 수 있게 되었고, 또 능력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22-31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통해 이 예언이 이뤄졌음을 증명해 주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에 대한 근거로 시편 16편과 시편 110편을 제시합니다. 이 두 편의 시는 다윗이 쓴 시로, 다윗은 신분상 왕이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선지자로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신의 자손 중에 메시아가 올 것을 알려주셔서 장차 그 분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다윗은 이것을 시로 지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시를 자신의 설교에서 풀어서 예수님이 이 다윗의 시를 성취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하게 말씀을 성취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자의로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하나씩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에게는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이었습니다.
소요리문답 27번은 "예수님은 어떻게 낮아지셨습니까?"라고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 비천한 환경에서 자라고, 율법에 복종하며, 세상의 온갖 고통과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묻히며, 잠시 동안 죽음의 세력 아래 계십으로 낮아지셨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비하"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고통의 삶을 사셨습니다.
때문에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서의 다스림이 그리고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다시 오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실상 이 세상에서의 삶은 주님의 제자로서 좁은 길은 걷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과 함께 고통의 길을 먼저 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 성령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예수님처럼 성령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하고, 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처럼 성령의 임재하심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내 뜻과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며 사셨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이루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YPO-1P_pdJw
https://www.youtube.com/watch?v=P5QFkGLgD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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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사도행전 2:1-2:13) (0) | 2018.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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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u.or.kr/03bible/daily/qtView.do?qtType=QT1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도행전 2:1-2:13)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 날은 오순절이었습니다. 유월절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50일, 예수님의 승천으로부터 10일이 지난 뜻깊은 날이었고, 제자들은 이 날을 위해 열심히 기도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 오순절은 밀의 첫 수확을 감사하는 축제(레위기 23:15-21),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
강한 바람 소리,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의 보여짐... 즉 이러한 현상이 어떤 환각 중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현상으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누가는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언이라는 것이 당시 성령을 받지 못했던 사람(5절에 경건한 유대인들)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하는 사람들이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외국어방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기도 소리는 다락방을 넘어 외부에까지 들려졌고,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고 소동했습니다(6절).
열거된 15지역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던 경건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말로 기도하는 이 놀라운 현상을 목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아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며 외쳤던 그 내용은 무엇을까요?
11절을 보면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큰 일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고 있기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큰 일은 바로 창조와 구속이고, 이 상황에서는 구속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즉 다른 언어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본 일반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고 당황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새 술에 취했다'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영적인 안목이 없는 사람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임재 앞에 당황스러워하거나 조롱할 수 밖게 없게 됩니다.
성령이 오셨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이 이 땅에 오심으로 제자들은 놀랍게 변화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가 제자로서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중생) 성령은 우리 가운데 임하십니다.
물론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는 놀라운 현상으로 오실 수도, 또 반대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내 안에 임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동일한 그 분이 임함으로 우리의 삶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구합시다. 그리고 이미 그 분의 임재를 경험했다면 성령의 충만을 구합시다!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갑시다.
주님!
날마다 매 순간다마 성령의 임재와 충만 속에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그래서 내 옛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새 사람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PzlHBfF2yq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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